바보들의 세상
“이봐, 로봇!”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로봇을 찾는다. 로봇은 그의 행위 일체를 관리 감독하는 개인비서 역할을 하고 있다. 로봇의 머릿속에는 그가 일어나는 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모든 행동에 대해 철저히 계산된 과학적인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다.
“네, 주인님. 말씀하십시오.”
로봇이 미끄러지듯 굴러온다. 로봇은 주인의 호출에 긴장된 표정이 역력하다. 말이 로봇이지 퍼뜩 봐서는 기계인지 사람인지의 구별이 쉽지 않다. 잘 만들어진 인조인간 즉, 인공지능 로봇이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괜찮겠어?”
그는 아랫배가 터질 듯 아프다. 그의 표정이 죽을상이다. 분석을 하는 로봇의 눈이 바쁘게 움직인다. 순식간에 분석이 끝난다.
“주인님. 어제저녁에 식사하신 음식물을 소화하고 그 영양분을 흡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직 5분 27초 남았습니다. 원활한 신진대사를 위해 조금 참으십시오. 시간이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로봇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그는 로봇의 말에 어떠한 반론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가 아는 로봇은 정확하다. 이의가 있을 리가 없다. 궁금한 것이나 어려운 일은 로봇에게 물어보면 된다. 무슨 일이든 로봇이 시키는 대로 하면 하자가 없다. 그게 제일 편하고 쉬운 방법이다. 머리 아프게 계산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는 힘들지만 참기로 한다.
“응, 알았어.”
그는 배를 움켜쥔다. 로봇이 제자리로 돌아가며 한마디 한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주인님께 신뢰점수 10점을 드립니다. 관리점수 합계 879점으로 현재 상태 양호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의 아침 풍경일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럴 경우, 과연 누가 주인인가? 로봇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사람이 로봇을 부리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로봇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과학의 발전이 눈부시다. 청소로봇은 벌써 옛말이 되었고 얼마 전에는 노래하는 로봇가수까지 등장했다.
로봇의 사전적인 의미는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걷기도 하고 말도 하는 기계 장치’이다. 즉, 인조인간을 말한다. 로봇은 체코어로 ‘강제로 일한다(robota)’라는 말이다. ‘로봇’이라는 말은 1920년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로섬의 인조인간(Rossum’s Universal Robots)’이라는 희곡에 등장한 이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이 희곡에서 로봇은 인간의 일 즉, 노동을 대신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그 로봇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노동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입력한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지 로봇 자체가 인간적인 정서나 영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로봇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일하는 기계로서의 역할 뿐이다. 하지만, 그 로봇은 시간이 갈수록 지능이 발달하고 진화해서 결국 인간을 멸망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의 로봇의 역할이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로봇의 역할에는 순기능도 얼마든지 있다. 요리나 청소를 하는 가사도우미 같은 간단한 일부터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고도의 정밀 작업이라든지 또는, 해저나 동굴 속처럼 위험한 곳의 탐사 등 여러 방면에서 실용화되고 있다. 이렇듯 기계나 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기계문명의 인간지배는 극단적인 논리의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당장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출근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뭔가 허전하고 불안하다. 금단 현상처럼 가슴이 두근거릴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은 전화를 가지러 집으로 쫓아가는 것은 아닐까? 장담 못할 일이다.
전에는 계산기 없이도 잘하던 속셈이 이제는 영 믿기지가 않는다. 어떻게든 계산기를 구해 두드려야 직성이 풀린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머리가 녹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신체는 구조적으로 적당히 사용했을 때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지나치게 쓰면 파괴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쇠퇴해 지는 것이다. 어떤 장기(臟器)든 마찬가지다.
비근한 예를 하나 더 보자. 내비게이션이다. 으레 차만 타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한다. 아는 길이건 모르는 길이건 상관이 없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기계음을 듣고 화면을 보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바보가 되어 간다.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고 기계에 의존하는 무기력 속으로 점차 빠져들고 있다.
문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성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발전하여야 한다. 현대기술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편리한 생활수단이나 기구 즉, 문명의 이기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한 인간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갈수록 옥죄어 오는 문명의 이기 앞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하지만, 기계문명은 양날을 가진 칼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효용성은 달라진다. 올바르게 이용하면 윤택하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잘못 사용한다면 인간의 존엄성 상실이라는 큰 재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다. 뜨거운 피 한 방울 없는 차가운 기계덩어리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지배당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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