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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日記)

나무 속에서 자본다

 

지난 2일 세브란스 병원, 님은 가셨다.

의식을 잃기 직전, 시인은 제자의 손바닥을 찾는다.

시인은 혼신의 힘을 다한다. 오 규원님이다.

손톱으로 새긴 글자 하나하나가 제자의 손바닥에서 詩로 태어난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시인은 숨을 고른다. 향년 66세의 아까운 나이다.

한참 후, 시인은 마지막 행을 제자의 손바닥에 쓴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그리고 시인은 숨을 놓는다. 불이 꺼진다.

한국 시단에서, 언어 탐구의 거목이었던 오 규원 님.

추상의 나뭇가지에 살고 있는 언어를 탐구했던 시인.

시적 언어의 투명성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

독특한 시 세계를 일궜던 님은 그렇게 가셨다.

만성폐쇄성폐질환이라는 희귀병의 고통 속에서도

님은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시집을 낸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다.

님은 ‘날(生) 이미지 시’를 제창한다.

존재의 현상 그 자체를 언어화하자고 외친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던 시인.

오늘, 하늘도 슬픔 겨워 무겁게 내려앉은 오후,

강화도 전등사 야산 아름드리나무 밑에

시인은, 당신의 시처럼 나무 속에서 잠이 든다.

시인은, 의식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쁜 숨 몰아쉬며 운명처럼, 시인은 시를 썻다.

내려놓지 못한 내 마음의 무게가, 千斤이다. 




조선일보 外

07/02/05 淸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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