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신(盜神), 출정하다
김 대 성
오늘 중요한 작업이 있다. 나는 15년 전부터 이 일을 하고 있다. 짧지 않은 기간에 이십여 건의 크고 작은 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나를 긴장시킨 일은 지금까지 맹세코 없었다. 오늘 작업은 그동안 내가 수행한 일 중에서 규모나 내용 등 모든 면에서 단연 으뜸이다. 이제 모든 준비가 무리 없이 끝났다. 다만, 작업 복장 선정 문제에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양복을 입으려 했다. 그 집은 주로 양복 입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한두 명이 아니라 늘 수십 명이 우글거린다. 모르긴 해도 옛날 도둑놈 소굴도 그랬을 거다. 어디 가나 구린내가 풍기는 곳에는 똥파리가 모이게 마련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 집에도 뭔가 구린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 냄새를 맡은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눈을 번득이며 먹잇감을 찾아 모이고 있는 거다.
나도 양복이 그 집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오늘 작업의 핵심은 차고에 있다. 경비원들이 24시간 철저히 근무를 하고 있다. 아마 그들은 총까지 가지고 있을 거다. 그들의 감시망을 뚫고 차고까지 접근하는 것이 문제다. 차고는 황토방 옆에 있다. 황토방은 그 집주인이 찜질하는 것을 좋아해서 작년에 차고 옆에 지었다. 정문을 지나 본관 쪽으로 돌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30m쯤 가다 보면 작은 연못이 나온다. 그 연못을 끼고 길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황토방은 거기서 오른쪽 가야 한다. 그 집은 창경궁처럼 돌을 높이 쌓아 담장을 만들었다. 황토방은 그 돌담 옆에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에 초가를 얹은 방 하나의 자그마한 집이다. 돌담을 기대고 서 있는 아름드리 오동나무와 연못 옆에 있는 팔각정과 어우러져 제법 운치가 있다. 정자 현판에는 세심정이라고 쓰여 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씻는다, 뭐 이런 의미라고 한다. 어쨌든, 그 옆으로 황토방을 데우는데 쓰는 장작더미가 있다. 양복을 입고 장작더미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다른 사람들 시선을 끌기 십상이다. 양복은 문제가 있다. 고민 끝에 나는 장작배달부로 역할 설정을 했다. 장작 배달을 왔다, 장작을 실은 차는 곧 도착한다, 어디에다 장작을 쌓으면 되느냐. 이렇게 하면서 차고로 접근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의상을 입어야 한다. 나는 청바지에다 운동복을 걸친다. 모자는 반드시 써야하는 작업준비물 1호다. 몇 년 전부터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젠 앞이마가 제법 시원하게 벗겨졌다. 작업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각인될 소지가 있는 것은 사전에 철저하게 차단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모자를 쓰고 작업을 한다. 모자는 중요한 변장 도구다. 오늘의 의상에는 각설이 모자가 궁합이 맞다. 각설이 모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자다. 중요한 작업 도구라 잘 둔다고 두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원래 그렇게 잘 모셔둔 물건일수록 필요할 때 찾기가 어려운 법이다. 굴러다니는 모자를 손에 잡히는 대로 눌러 쓴다. 청바지와 비슷한 천으로 된 모자다.
드디어 출정이다. 나는 현관으로 간다. 신발들이 나 뒹군다. 슬리퍼, 운동화, 장화, 구두 등 종류도 다양하다. 고무신도 있다. 낡은 고무신이다. 이 고무신은 작년 여름에 피서 갔다 오는 길에 가지고 온 거다. 우리가 묵었던 민박집 주인양반 고무신이다. 다른 사람한테는 모르고 가져 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알면서 그냥 신고 왔다. 고무신 하나가 뭐 그리 탐이 나서 훔쳤겠는가.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이유인즉슨, 민박집 주인이 우리에게 터무니없이 바가지를 씌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서 철이라고 해도 그렇지, 방 하나 값으로 평소보다 열 배나 비싼 40만 원을 달라고 했다. 입이 딱 벌어질 노릇이었다. 바가지도 보통 바가지가 아니었다. 순 날도둑 심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20만 원만 했어도 승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는 우리로서는 바가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바가지 쓴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또, 앞으로는 올곧게 살라는 경고의 의미로 고무신을 신고 왔다. 바가지 대신 고무신 가져감, 이라는 경고문도 남겼다. 그러나 그 의미가 민박집 주인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고무신은 비 오는 날이라든지 동네 나들이할 때 제격이다. 흠이라면 걸을 때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다.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나아서 낡았지만 버리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작업의 종류에 따라 고무신이 언제 필요로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릇 작업의 베테랑이 되려면 도구가 많아야 한다. 그러한 사실은 작업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피부로 실감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작업의 3대 성공 요소는 사람, 정신, 그리고 도구이기 때문이다.
도둑 얘기가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사실은 나도 도둑, 하면 찔리는 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그쪽과 닮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개념의 도둑과는 다르다. 나는 아직 선량한 백성, 즉 대다수 착한 국민의 재산이나 생명을 노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하는 일은 날도둑이 훔친 물품이나 현금 등을 잠시 빌리는 거다. 빌린다는 것은 언젠가 돌려주겠다는 의미가 있다. 언제 갚을 거라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대상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나의 작업의 대상은 생계형 ‘좀도둑’이 아닌 뱃가죽에 기름때가 낀 ‘날도둑’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좀도둑과 날도둑의 차이는 크다. 사전적인 의미로만 봐도 그렇다. 좀도둑은 ‘자질구레한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고, 날도둑은 ‘몹시 악독한 도둑’으로 되어 있다. 나는 후자의 날도둑만 상대를 한다. 하지만, 도 낄 개 낄, 오십 보 백 보, 겨 묻은 개나 똥 묻은 개나 마찬가지다, 거기서 거기다. 하니, 너도 도둑놈이다, 라고 한다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도둑도 도둑 나름이다. 굳이 나를 도둑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면, 좋다. 내가 도둑이라 치자. 그러나 나는 질과 격이 다른 도둑이다. 나는 날도둑에게 훔친 물건은 무엇이든, 얼마가 되었든 일단 반으로 나눈다. 반은 내가 쓰고 나머지 반은 불우이웃 등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위해 쓴다. 작업의 성과물에 대한 균등 배분의 원칙은 나의 철저한 소신이자, 철학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법을 어겨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반반의 원칙은 이름일 뿐이다. 결국, 결산을 해 보면 전리품의 대부분이 불우이웃 등으로 가 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나는 또 빈 털털이가 된다. 그렇게 되는 데는 돈에 대한 나의 철학도 한 몫을 한다. 돈은 돌고 돌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돈은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이 써야 한다. 즉 활용을 해야 한다. 돈은 쌓아두고 있으면 곰팡이가 생긴다. 고인 물이 썩 듯 썩는다. 그러면 당연히 똥파리가 모여들 것이고. 요즘 세태는 아흔아홉 석 가진 사람이 백 석을 만들려고 달랑 한 석뿐인 사람의 그것을 넘본다. 천석꾼에 천 가지 걱정 만석꾼에 만 가지 걱정이라는 말이 있다. 백 년도 못살 인생인데 천 년의 걱정을 하며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돈은 필요한 때 쓸 수 있을 만큼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좀 도둑하고 다른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내가 수행한 작업의 뒷얘기를 언제나 신문을 통해서 확인한다는데 있다. 나는 작업의 대상을 덩치 즉, 덩어리가 크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것만 목표로 잡는다. 그것도 사회적인 규범과 윤리에 반하는 반사회적인 날도둑놈들만 노린다. 신문을 본 대다수의 국민은 나의 팬이 된다. 그들은 들어내 놓고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잘했어. 최고야. 역시 그는 도신이야, 라고. 나는 나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한 즐기고 있다. 그러나 나 잘났다고 떠벌리고 다닐 처지가 아니고 보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운동화 한쪽을 툭 찬다. 운동화는 현관문에 부딪혀 다시 있던 자리로 간다. 나는 접는 우산을 집어 든다. 오늘 작업에는 작은 우산이 좋다. 빨리 움직이자면 되도록 짐이 적어야 한다. 나는 주먹으로 머리를 친다. 이런 정신하고는. 비는 어제 왔다.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게 개었다. 날씨가 맑은 날 우산을 가지고 다니면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본다. 그러면 작업을 망치기 십상이다. 최대한 특색 없이 군중 속에, 그리고 주변의 여건에 녹아들어 흡수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작업할 대상은 일반 주택가에 있다. 동네 주민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작업이 끝난 후에는 그 집에 있던 사람은 물론이고 그 주변 사람들도 나라는 존재의 특색을 기억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는 늘 그렇게 해 왔다. 그런 철저함이 있어서 15년 동안 하나의 증거나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평범하지만 중요한 나만의 장수 비결이자 노하우다. 그동안 장마라서 나는 으레 우산을 들고 다녔다. 며칠 사이에 습관처럼 몸에 밴 것 같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요즘 따라 부쩍 건망증도 늘고 금방 들은 얘기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직 치매가 올 나이는 아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여야겠다. 그러나 요즘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했다. 마음은 늘 있지만 잘 안 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뱃살만 불거져 나온다. 늘어지는 뱃살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무겁다. 유연하고 민첩하며 강한 몸은 작업의 필수요건이다. 몸만이 아니다. 빠른 머리 회전이 뒤따라야 실수 없고 실속 있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우리 집안은 치매의 가족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신경을 쓰고 있다. 건망증이 늘어가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다. 은퇴시점을 5년 후로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머리가 더 녹슬고 고장 나기 전에 은퇴할 생각이다. 5년 후에는 명예로운 은퇴를 할 것이다.
한동안 작업이 뜸했다. 그것은 작업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찾아보면 작업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그만큼 썩은 사회가 되고 있다는 증거다. 나에게는 나름의 작업에 임하는 법칙이 있다. 그중 하나가 1년에 2건 이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탐이 나는 일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야 하는 것이 사실은 고역이다. 그러나 욕심이 과하면 결국 자신을 망친다. 욕심을 부리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을 나는 주위에서 많이 봤다. 참 딱한 일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대다수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어 보지만 찜찜하다. 시장조사를 해 보면 가질 만큼 가지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더하다. 시장조사란 내가 작업의 대상을 정할 때 정보 등을 수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무엇이 모자라 물 불 가리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다 스스로 망가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들이 도둑이라고 부르는 나도 아는 일인데 그들은 왜 모를까. 안분지족 하는 현명함이 아쉽다. 과유불급.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작업을 함에 있어 늘 마음에 새기는 나의 좌우명이다. 어쨌든 나는 스스로 만든 틀을 깨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끝도 없이 썩어들어 가는 사회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그 규정을 손봐야 하는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손잡이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하나. 갑자기 궁금해진다. 나는 작업을 앞에 두면 평소와는 다른 몇 가지 행동특성이 나타난다. 그 특성 중 하나가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어른거린다는 거다. 꼭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다.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기억 저편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궁금한 것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그날이 되면 궁금해진다. 지금 손잡이의 경우가 그렇다. 왜 그것이 궁금해지는 건지 모른다. 심리학은 잘 모르지만 아마 긴장해서가 아닌가 싶다. 아니면 두뇌회전이 그만큼 빨라지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그것을 돌린다. 잠겨 있다.
나는 다시 거실로 간다. 휴대폰을 두고 왔다. 휴대폰은 화장실 서랍장 속에 있다. 아까 샤워하면서 젖을 까봐 넣어두었다. 나는 언제나 작업을 하기직전에 샤워를 하는 버릇이 있다. 산뜻한 마음으로 작업에 임해야 능률도 오르고 성공확률도 높다. 하지만, 수염은 절대로 깎지 않는다. 몇 년 전에 면도를 하고 작업하러 나갔다가 실패한 전례가 있다. 다리가 부러지는 중대 사고를 당했다. 반드시 그것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작업 전에는 면도를 안 한다. 미신이라고 흉을 봐도 좋다. 하지만, 나는 괘념치 않는다. 내 마음이 편하고 작업만 잘되면 그만이다. 전화 온 곳이 없는지 확인한다. 통화 기록이 없다. 전화가 올 곳은 특별히 없다. 간혹 전화가 오기는 한다. 하나, 그것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잘못 걸려온 전화다. 아니면 광고전화이거나. 그런데도 휴대폰이 손에 없으면 늘 허전하다. 간간이 벨 소리가 귓속에서 울릴 때도 있다. 화장실에 있다가도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화들짝 놀라 뛰쳐나가곤 한다. 자다가 꿈속에서 그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나는 그것 때문에 불면증으로 한참 고생을 했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아예 진동으로 놓기도 했다. 내가 휴대폰을 쓰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이 나를 부린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휴대폰과의 이별을 고려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휴대폰 배터리를 확인한다. 배터리 용량을 알리는 막대가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작업을 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철저한 준비가 성공을 보장한다. 작은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휴대폰 배터리를 갈아 끼운다.
나는 현관으로 간다. 작업 전용 슬리퍼를 찾는다. 슬리퍼가 보이지 않는다. 그 슬리퍼는 활동성이 있어 좋았다. 발뒤꿈치를 고정하는 끈이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벗겨지지 않았다. 지금 같은 여름에 작업을 할 때는 늘 그 슬리퍼를 애용했다. 이번 작업은 성격상 슬리퍼가 좋다. 그래야, 동네 사람인 척 행동하기가 쉽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면 산책 나온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할 수 없이 운동화를 신는다. 발뒤꿈치가 운동화 목에 걸린다. 양말을 신지 않아 발이 잘 들어가질 않는다. 양말을 신을까 하다가 그냥 둔다. 나는 운동화 뒤축을 발뒤꿈치로 비벼서 구긴다. 운동화 바닥에 발바닥이 닿는 느낌이 좋지 않다. 찝찝한 것이 개운치가 않다.
나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다. 철문이다. 도둑을 막는 용도다. 그래도 나는 철문이 싫다. 갇혀 있는 것 같다. 죄수 같은 느낌이다. 쇠창살의 서늘한 기운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다. 대학 졸업반이었다.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퍼마셨다. 내가 주전자를 집어던진 것은 생각이 난다. 그러나 그 이후는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다. 하지만, 쇠창살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점심때쯤 코뼈를 움켜쥔 깍두기 머리가 찾아왔었다. 내가 던진 주전자에 맞아 깍두기 머리의 코뼈가 내려앉았다. 한 학기 등록금으로 합의를 봤었다. 그때의 소름끼치던 쇠창살의 느낌이 아직 생생히 살아 있다. 요즘도 작업하다가 힘이라도 들라치면 그때 쇠창살의 감촉을 되새긴다. 실수해서 잡히면 바로 쇠창살에 갇힐 것이다. 그때 쇠창살의 그 느낌은 언제나 나의 나태를 쫓아주고 있다. 고마울 뿐이다.
이놈의 자물쇠는 더 싫다. 이놈은 밖에서 어떻게 잘못 잠그면 안에서는 열 수가 없다. 누군가 밖에서 열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떤 놈이 무슨 마음으로 이런 물건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놈이 이거 만들 때는 발상의 전환이니 뭐, 어쩌느니 하고 말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놈은 천당 가기는 다 틀렸다. 이놈의 자물쇠 때문에 몸을 팔던 여성 몇 명이 죽었다. 그들이 바깥으로 못 나오게 포주가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감시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아마 그런 용도로 쓰라고 만든 모양이다. 안에서 문을 열지 못하니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겠는가. 그때 집에 불이 붙었다. 출입문은 열리지 않지, 창문은 온통 쇠창살이 감옥처럼 버티고 있지, 불쌍한 영혼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뜨거운 불길에 허우적거리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기가 막히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는 입속으로 한마디 한다. 새끼들, 까불고 있어.
현관문에는 언제부턴가 낙인처럼 그것이 붙어 있었다. 나는 자물쇠를 본다. 자물쇠가 세 개나 있다. 가진 게 뭐,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문단속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위에서부터 스위치 위치를 ㅡ, ㅣ, ㅡ 로 해야 열리는지 ㅣ, ㅡ, ㅣ 로 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몇 번을 해봐도 열리지 않는다. 나는 단 한 번에 현관문을 열어 본 적이 아직 없다. 작업을 할 때 하고는 전혀 딴판이다. 이상한 일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내 성격 탓인 것 같다. 자물쇠나 금고문을 여는 일에는 날고 기는 전문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다. 나도 내가 전문가인 줄 몰랐다. 하지만, 수사하는 친구들 때문에 그 사실을 알았다. 작업이 끝나고 나면 다음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난다. 그것도 1면에. 신문은 무슨 수사본부장이라나 누군가 한 말로 도배가 된다. 전문가의 솜씨라는 거다. 나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꾸 전문가라고 하니 이제는 나는 전문가다, 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도 집 현관문을 열 때마다 체면을 구긴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이렇지는 않았다. 몇 번 용을 쓰면 열리곤 했다. 나는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보람찬 출정의 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정신을 가다듬는다. 순간, 현관문에 붙어 있는 작은 메모 쪽지가 보인다. 깨알 같은 글씨다. 제기랄. 스위치 위치를 ㅡ, ㅡ, ㅡ 로 바꿨단다. 매월 1일이 그것 바꾸는 날이란다. 오늘이 1일이다.
나는 현관문을 닫는다. 현관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닫힌다. 자동으로 부드럽게 닫히는 장치를 수없이 조절했는데도 잘 안 된다. 매번 이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소리가 싫지만은 않다. 왠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나는 문을 다시 연다. 끝까지 문을 젖힌다. 슬며시 놓는다. 꽝, 벼락 치는 소리가 난다. 후련하다. 어릴 때도 그런 적이 있었다. 시골에 살았을 때다. 아마 고등학생이었을 거다. 나보다 여섯 살 더 먹은 막내 삼촌이 있었다. 삼촌은 돈 벌어 온다며 늘 집을 떠나 있었다. 삼촌은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면 언제나 나를 들볶았다. 공책 가져와라, 성적표 좀 보자,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런 거다. 끝이 없었다. 당시의 나는 성적도 전교 1등이었고 전국 규모 학생 그림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태권도 대표선수로 전국체전에 참가하여 발군의 성적을 보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노인네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교육부 주최 학생 시조 대전에서 장원의 자리에 오른 일이었다. 늘 말썽만 부리는 삼촌하고는 비교 자체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도 삼촌은 나만 보면 고양이 쥐 잡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삼촌의 훈계는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급기야 삼촌의 귀에다 대고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야아, 하고. 지금 생각해도 속이 시원하다. 삼촌은 귀 때문에 며칠 고생했을 것이다.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다음부터 삼촌의 훈계는 다시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등산을 좋아한다. 정상에서 마음 놓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것이 산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답답할 때 마음껏 소리를 지르면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그러나 시끄럽고 큰 소리를 듣는 것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부서지는 것 같은 현관문 소리에 출정을 앞두고 긴장된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된다. 작업을 할 때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래야,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 현관문이 닫힌 자리를 뒤로하고 작은 공간을 만난다. 아파트 실내하고는 느낌이 다르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나는 싫다. 갇혀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언젠가는 마당 넓은 집에서 살 것이다. 명예로운 은퇴를 한 뒤에 말이다. 여기는 숨을 쉴만하다. 나는 팔을 쭉 벋어 가슴을 편다. 뚜 둑. 가슴이 결린다. 목을 서너 바퀴 돌린다. 몸을 잘 풀어야 작업이 수월해진다. 유사시에는 나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믿을 것이라고는 오직 몸뚱이밖에 없다. 두 팔과 다리, 그리고 온몸이 잘 움직여 주어야 한다. 허리를 굽힌다. 손가락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전에는 손바닥 하고도 그 끝이 바닥에 닿았다. 아무래도 운동 부족이다. 무릎을 굽힌다. 나는 발차기를 한다. 공기를 가르는 발끝에 힘이 실린다. 주먹을 꽉 쥔다. 권투하는 것처럼 앞으로 쭉쭉, 서너 번을 뻗는다. 주먹에서 쉭쉭, 소리가 난다. 아직 쓸 만하다. 어깨를 으쓱해 본다. 새끼들, 까불고 있어. 옛날에도 그랬다. 이 소룡 영화를 보고 나면 더구나 그러했다. 정무문, 당산대형, 뭐, 이런 거 보고 나올 때면 나는 언제나 극장 앞 출입구의 철망 위로 날아서 나왔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새끼들, 까불고 있어. 그때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내 몸이 가벼웠다. 나는 엘리베이터, 아니 승강기 앞으로 다가간다. 승강기라는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왜 어렵고 긴 엘리베이터라는 다른 나라말을 쓰는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하긴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추자면 그러하기도 하겠다. 하나, 나에게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영어에 대한 추억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나자 영어 단어 시험을 봤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쪽지시험이었던 셈이다. 알파벳을 소문자로 써야하는 것을 전부 대문자로 썼다. 그때만 해도 영어공부를 처음 시작한 햇병아리였다. 처음 보는 시험이었고, 성적과도 무관한 것이었으니 애교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다음에는 잘하세요, 라는 애정 어린 경고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존경하는 영어 선생님께서는 ‘0’ 점을 줬다. 하늘이 노랬다. 초등학교 때는 교과서 전체를 암기했던 나다. 졸업할 때까지 95점 이하의 점수를 받아보질 않았다. 어린 나이에 상실감이 어떠했겠는가. 그때부터 나는 영어 선생님이 보기가 싫었다. 영어 시간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어 실력을 만회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했던가.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나 누구를 가르치는 사람의 언행과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 나의 작업의 대상은 대부분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나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면 누가 그들에게 경고도 주고 올곧게 살 수 있는 길을 생각할 기회를 주겠는가. 나의 역할의 중요성을 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승강기는 12층에 멈춰 있다. 여기는 15층이다. 가까운 곳에 있다. 하지만, 불안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누가 나보다 미리 버튼을 누를 것만 같다. 나는 재빠르게 버튼을 누른다. 순간, 승강기의 층을 표시하는 숫자가 움직인다. 11, 10, 9……. 아래로 내려간다. 제기랄. 늘 이 모양이다. 띠딩. B4에서 멈췄다. 내가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누군가 지하 4층에서 버튼을 눌렀다. 이제 최소한 25층까지는 올라갔다가 내려올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오죽하면 몇 층까지 올라갈 건가를 놓고 내기까지 했겠는가. 25층은 기본이다. 그냥 걸어갈까. 계단으로 걸어가면 승강기보다 빨리 1층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나는 이내 마음을 바꾼다. 손해 보는 것 같다. 2층 아줌마는 어제도 1층에서 승강기를 탔다. 쿡, 하고 내가 웃었다. 아줌마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승강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바깥으로 몸을 돌린다.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휙, 불어온다. 승강기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있다. 그동안 바깥바람이라도 마셔야겠다. 계단이 보인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걸친다. 움찔한다. 아래로 내려가면 올라오는 데 힘이 들것 같다. 위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한다. 그래야, 내려올 때 쉬울 것이 아닌가. 나는 고개를 든다. 문득, 창문으로 달처럼 생긴 무언가 보인다. 뭐지. 달이다. 달이 눈썹을 닮았다. 벌건 대낮에 나타났으니 초저녁이면 질 것이다. 그렇다면, 초승달이다. 달은 창문 구석에 걸려 있다. 구석은 답답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달을 창문의 중앙으로 보내고 싶다. 나는 다리를 굽혀 시선을 낮춘다. 달이 창문의 중앙으로 온다. 창문의 대각선 중앙에 정확히 달을 세운다. 조준 선 정열이 잘된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왠지 오늘 작업이 수월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 작업이 잘 마무리 되면 할 일이 많다. 몇 개월 동안 술 사준 놈들 찾아다니면서 술빚도 갚아야 하고. 여행도 다닐 것이다.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다. 멋진 차도 뽑을 것이고. 이것저것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곰 상(마누라)한테 큰 소리고 쳐야겠고. 일일이 다 말하기가 벅차다. 누군가 말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오후 4시 10분이다. 차고에서의 작업은 4시 50분에서 55분 사이에 마쳐야 한다. 5시 정각에 차는 그 집을 떠난다. 여의도 어디로 간다고 하는데 그것은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것까지 내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다. 나는 차가 떠나기 직전에 그 차를 접수하면 되는 거다. 5분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 집 운전기사가 본관에서 주인에게 차의 열쇠를 받고 상황실에 들른다. 거기에 운행 접수를 하면 상황실에서 차고의 문을 열어준다. 차량 입출을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자동으로 차문이 열리고 닫힌다. 운전기사가 상황실에서 차고까지 걸어오는 시간이 5분이다. 나는 그 사이에 차를 차고에서 끌고 나와야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아직 40분이 남았다. 택시를 타면 25분 정도 걸리니까 그 집에 4시 35분이면 도착한다. 정문을 통과하여 차고에 도착하면 4시 45분 정도가 될 것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평상심을 유지할 때 작업의 효율이 높아진다. 그러나 오늘따라 진정이 안 된다. 아마 덩어리가 커서일 거다. 자그마치 150억이다. 그동안의 해온 작업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계획대로 작업이 진행되면 정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차를 끌고 나오기까지 15분이면 일이 끝난다. 15분 동안에 150억이 생기는 것이다. 1분에 10억이다. 세상 어디에 이런 일이 있는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자긍심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작업에 임할 때마다 전율과 동시에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나는 그런 느낌이 좋다. 성공한 뒤에 오는 나른한 쾌감하고는 성격이 다르다. 그 느낌은 내가 이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150억이 지금 그 집 차고에 모셔져 있다. 내가 입수한 정보가 틀리지 않다면 2,5톤 탑 차에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엄청난 고급 정보를 입수한 방법에 대해서는 절대로 밝힐 수 없다. 나는 프로기 때문이다. 그 차에 돈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집에서도 한두 명밖에 없다. 그런 사실도 나의 작업에는 도움이 된다. 만 원권으로 50억 그리고 무기명채권이 100억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대 기업에서 그 집주인에게 더운데 수고하신다고 수박 값이나 하라고 주는 돈이란다. 그 집주인은 정치판에서 잘 나가는 실세, 즉 거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정치판. 틀린 말인가? 아니다. 어차피 정치판은 개판, 깽판, 아사리 판, 이판사판이 아닌가. 나는 정치는 잘 모른다. 아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다.
돈 전달 방법이 묘하다. 남의 눈이 있어서 대 놓고 주기가 뭣하니까 약간의 잔꾀를 부렸다. 일단 탑 차에 돈과 채권이 든 사과박스를 싣는다. 대기업의 하수인 운전자를 a라고 치자. a는 그 차를 끌고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으로 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a는 커피숍으로 간다. 거기에는 그 집주인, 즉 정치꾼의 하수인인 b가 앉아 있다. a는 하수인 b의 오른쪽 자리에 앉는다. 암호로 접선을 한다. a가 청렴이라고 운을 뗀다. b가 결백이라고 답한다. a가 8396 한다. b가 7354 한다. 차번호다. a는 왼손에 쥐고 있던 차 열쇠를 b 옆에 놓는다. b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차 열쇠를 마찬가지로 a 옆으로 민다. 열쇠 모양이 똑같다. 이제 커피숍에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둘은 서로 열쇠를 바꾸어 들고 일어선다. 시침을 뚝 단다. 서로 제 갈 길로 간다. 입도 대지 않은 커피 잔 위로 뜨거운 김이 춤을 추고 있다.
나는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삐거덕. 육중한 철문이 기지개를 켜듯이 서서히 열린다. 검은 양복의 덩치가 내 아래위를 살쾡이 눈으로 훑는다. 저, 장작 배달 때문에. 나는 한껏 어깨를 움츠린다. 최대한 주눅이 든 것처럼 보여야 한다. 저런 놈이 무엇을 하겠어,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경계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거니까. 슬쩍 본 경비실 안에 사람들이 덩치 뒤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대여섯 명은 되어 보인다. 하나같이 가스총이니 혹은, 진압봉 같은 것을 들고 있다. 군데군데 올빼미 눈이 보인다. 올빼미 눈이 나를 따라다니며 연방 눈을 끔뻑인다. 내 모습이 가감 없이 찍히고 있을 것이다. 하나, 별 대수인가. 작업이 끝나고 수염만 없애 버리면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부모가 나에게 준 자연산 무공해 변장술이다. 무공해는 일단 좋은 거다. 백화점에서도 같은 채소를 얼음 공기 나오는 곳에 넣어두고, ‘여기는 무공해’라고 종이쪽지 하나만 턱하고 매달아놓으면 값이 거의 두 배나 비싸지 않은가. 나는 도인의 자질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나는 타고난 도신이다. 그리고 저 올빼미들 중에 제대로 작동되는 놈은 아마 한두 개일 것이다. 그것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확인된 사항이다. 그래서 나는 올빼미가 작업의 걸림돌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나저나 무서운 세상이다. 어디 가나 저놈의 올빼미 눈은 나를 아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은행이나 백화점 등은 물론이고 이제는 대로상에서도 그놈이 지킨다고 한다. 오죽하면 발가벗고 거시기 덜렁거리는 사우나 탈의실도 그놈이 지키고 있다니, 참. 더러운 불신의 세상이다.
덩치가 눈을 내리깐다. 황토방 쪽을 가리키며 턱짓을 한다. 힐끔 한번 처다 봤을 뿐이다. 통과해도 좋다는 얘기다. 나는 허리를 반으로 접는다. 덩치의 찢어진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흐른다. 속에서 비위가 확 상한다. 뭔가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온다. 나는 그것을 목구멍 속으로 다시 구겨 넣는다. 나는 속으로 한마디 한다. 새끼들, 까불고 있어. 나는 느릿하게 걸어간다. 최대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바닥에 있는 돌을 한번 툭 차 본다. 한여름의 태양은 죽기 살기로 이글거린다. 양복들이 앉거나 혹은 선 채 삼삼오오 그늘을 파묻혀 있다. 가끔 한두 명이 나를 힐끔거릴 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긴 배부른 양복들이 한낱 장작배달꾼인 나에게 관심이 있어야 얼마나 있겠는가. 주인집 개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오기는 지금이 처음이다. 그래서 내부 구조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다. 작업하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차고는 정문에서 보이지 않는다. 본 건물 뒤로 황토방 귀퉁이만 삐죽 보인다. 황토방 뒤쪽에 차고가 있을 거다. 차고는 지하에 있다. 장작더미 바로 옆에 차고로 들어가는 쪽문이 보인다. 지금 시각, 4시 48분이다. 나는 훅, 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하릴없이 애꿎은 장작더미를 툭 친다. 긴장된 시간이 흐른다. 2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가. 시간이 짧다거나 길게 느껴지는 것, 이 모두가 마음에 있다. 차를 몰고 가면 보행자 신호가 길어 보이고 횡단 보도 신호를 기다릴 때면 차량 진행 신호가 길게 느껴지는 거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 하지 않는가.
나는 시계를 본다. 4시 50분이다. 철컥, 하는 금속성이 꿈결인 양 들린다. 차고의 철문이 열렸다. 나는 지체 없이 차고로 들어간다. 차가 있다. 냉동 탑 차다. 나는 만능열쇠로 차문을 딴다. 이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다. 근데 누워서 떡 먹는 것을 누가 쉽다고 말했는가. 떡고물 바닥으로 떨어지지, 코로 들어가지, 실제로 누워서 덕 먹어 보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철커덕, 차문이 열린다. 이제 시동을 걸면 된다. 핀 하나만 있으면 시동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그래, 식은 죽은 먹기가 쉽다. 후루룩, 하면 되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왜 자꾸 잡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자동차 키 배선을 찾는다. 나는 배선 두 가닥을 자른다. 그것을 핀으로 연결한다. 부르릉, 시동이 걸린다. 성공이다. 나는 안전벨트를 맨다. 벨트 미착용으로 경찰에라도 걸리는 날에는 만사 도루묵이다. 시계를 본다. 4시 54분이다. 이제 출발이다. 세상은 나의 것이다. 차고가 지하라서 그런지 찜통 같은 느낌이다. 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눈을 뜨기가 힘이 든다. 숨이 콱 막힌다. 나는 엑셀을 밟은 발에 지그시 힘을 준다. 차가 튀듯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힘차게 출발한다.
치워. 어디서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린다. 뭘 치우라는 얘기지. 누가 쫒아 오나. 나는 엑셀을 밟은 발에 더욱 힘을 준다. 이 인간이 미쳤나 왜 발로 사람을 짓이겨. 이 삼복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반 지하방에서. 이 더운 대낮에 잠이 오냐 이 화상아. 곰상이 눈에 쌍심지를 켠다. 단잠에 모처럼 단단해진 내 아랫도리가 번데기처럼 서서히 줄어든다. ■
070410淸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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