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短篇小說)

잃어버린 마을- 全文

淸海 김대성 2020. 4. 9. 11:39
<단편소설 200x96매>

잃어버린 마을

 

 

                                                                                                                           김 대성

 

 가을비가 추적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가랑비는 마당을 온통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더구나 느닷없이 들이닥친 돌개바람이 볏짚이며 작은 나뭇잎 부스러기를 사방으로 흩뿌려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콧구멍만 한 마당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옥이는 섬돌 밑에 죽은 듯이 널브러져 꿈쩍을 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꿰맨 자국이 선명한 검정 통치마는 무릎까지 말려 올라갔고 누르스름한 무명적삼은 황토 흙으로 범벅이 되어 울긋불긋하였다. 치마단 밖으로 삐죽 내민 가늘고 흰 종아리가 간간이 움찔거리는 것이 살아있음을 말할 뿐이었다. 병태는 술이라도 한잔 걸쳤는지 불콰한 얼굴에 가시눈으로 옥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해, 말하란 말이야.”

 병태의 손에 들린 도끼가 가늘게 떨렸다. 푸수수한 머리칼은 칼끝처럼 곤두섰고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선명했다. 그러나 옥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병태가 옥이를 찾아온 것은 한 시간 전쯤이었다. 악을 쓰던 병태가 옥이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질퍽한 마당으로 내동댕이치고는 저렇듯 족치고 있는 거였다. 지난달 보름날에도 그랬으니 이런 일이 달포 동안에 벌써 세 번째였다.

 “그래도 아직…….”

 병태가 도끼를 옥이 머리 위로 휙, 치켜들었다. 옥이는 아련한 의식 속에서도 목 줄기를 파고드는 도끼의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옥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풀어헤쳐 진 쪽에는 비녀 대신 찔러 놓은 숟가락이 금방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어디다 숨겼어 옥아, 말해 제발. 그 더러운 씨가 없어져야 우리가 살 수 있단 말이야, 이 바보야.”

 시간이 갈수록 병태도 지쳐 가는지 목소리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아니, 애원이라기보다 짐승의 울부짖음을 닮았다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병태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문득, 옥이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

 옥이는 초점 잃은 눈으로 병태를 쳐다봤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못하고 쓸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옥이는 다시 머리를 땅으로 내려뜨렸다. 죄 없는 핏덩어리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일 뿐이었다. 답답하기는 옥이도 마찬가지였다. 기대에 찬 눈으로 옥이를 바라보던 병태의 눈이 번득였다.

 "좋다. 오늘 아주 끝장을 내자."

 병태는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붉은 핏줄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순간, 병태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병태의 팔에서 댕강 잘려나간 손목이 진흙탕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인 양 꿈틀거렸다.

 옥이는 허겁지겁 돼지우리 옆에 있는 짚더미 속에서 굴동이를 끄집어내었다. 굴동이는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에 짚 부스러기들이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있었다. 온몸을 한참 주무르고 나서야 막혔던 숨이 트이는 듯 울음을 터트렸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한줄기 스산한 바람이 마당을 휘졌고 돌담 너머로 사라져갔다.

 

 

 옥이는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동광리에 있는 황 첨지 댁에 바느질거리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울창한 대나무 숲이 길을 따라 담처럼 늘어서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고는 하나 쏟아져 내리는 초여름의 햇볕은 따갑기만 했다. 길가에는 제멋대로 자란 잡초 속에서 노란 유채꽃 하며 온갖 이름 모를 들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동광리는 13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동광리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중 산간 마을로 무동이왓 이라고도 불렸다. 무동이왓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동광리에는 이 지역 유일의 교육기관인 2년제의 동광 간이학교가 있었다. 멀리 떨어진 중문에서도 학생들이 이 학교에 다닐 정도로 발전하고 진취적인 마을이었다. 대나무 숲의 도열이 끝나자 야트막한 돌담길이 이어졌다.

 언덕바지에 있는 넓은 밭에는 며칠 새 훌쩍 자란 보리가 한창 소담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동광리까지는 옥이가 잰걸음으로 걸어도 한 시간은 좋이 걸리는 거리였다. 옥이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은 물질에서 손을 놓았지만 젊었을 때는 군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해녀였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두 식구는 거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옥이의 발걸음이 가벼운 또 다른 이유는 황 첨지의 외아들 병태 때문이었다. 황 첨지는 슬하에 아들 병태와 보통학교 6학년에 다니는 12살 터울의 딸 하나를 두었다. 황 첨지는 느지막하게 본 막내딸의 재롱에 세상 시름을 잊으며 살고 있었다. 병태는 성품이 온순하고 예의 바른데다 해방 직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법학을 전공한 인텔리기도 하였다. 황 첨지의 재산 또한 녹록치 않아 남제주군에서는 최고의 신랑감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쩌면 손이 이리도 고울꼬. 처자는 올해 나이가 몇인가.”

 지난번 바느질거리를 가지러 갔을 때였다. 황 첨지 부인이 옥이의 손을 잡고 은근히 관심을 보이며 한 말이었다. 황 첨지 댁에서는 옥이를 병태의 배필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옥이에게 바느질일을 맡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예삿일은 아니었다. 옥이도 병태와 대 놓고 말을 나눈 적은 없었으나 눈인사 정도는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럴 때마다 옥이는 가슴이 콩닥거리곤 했다.

 “저…….”

 황 첨지 댁에서 바느질감을 받아 나오는 길이었다. 얼굴이라도 볼까 하여 집안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던 병태가 대나무 숲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순간, 옥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쭈빗거리며 내미는 병태의 손에는 작은 쪽지가 들려 있었다. 엉겁결에 쪽지를 받은 옥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병태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돌담 뒤로 부리나케 사라졌다. 돌담 군데군데 찔레꽃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매미의 합창이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22살 처녀의 수줍은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오르기만 하였다.

 

 

 3월 1일. 기미 만세운동 28주년이었다. 옥이네 동네도 다른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온통 태극기의 물결이었다. 옥이에게 지나간 동지섣달 몇 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황 첨지 댁에서 놓은 매파가 옥이네 집을 몇 번 다녀가면서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사자의 의사를 짐작한 양가부모들은 혼사를 미룰 이유가 없었다. 올가을에는 좋은 날을 받아 혼인을 할 터였다. 옥이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꽃도, 새들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옥이를 위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옥이는 내일 어머니와 같이 혼수 감도 알아볼 겸 대처의 시장에 다녀올 참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병태는 아직 뚜렷한 일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공은 법학을 하였으나 교육자의 길에 뜻이 있는 병태였다. 같이 일하자는 데가 여러 군데 있었으나 선뜻 결정을 못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병태는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이 되어 행사 준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우리 제주도민에게 재작년의 8.15해방은 단순히 일제치하의 속박에서 풀려난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어. 그건 죽음으로부터의 광복을 뜻하는 거야. 만약 일본의 항복이 한 달만 늦었어도 우리 제주도는 불바다가 되었을 거야. 천만다행이지."

 며칠 전에 만난 병태가 옥이에게 한 말은 이러했다. 오키나와가 점령당하는 등 전세가 기울어졌다. 그러자 일본은 제주도를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 결전의 최후 보루로 삼았다. 일본은 미군이 9∼10월경, 2∼5개 사단병력을 제주도에 상륙시킨다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관동군을 비롯한 정예군 7만 명을 제주도로 이동 배치했다. 미군이 제주에 상륙할 경우 7만 일본군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최후까지 유격전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20만 명의 제주도민을 결전의 소모품으로 사용한다는 거였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광복을 맞은 제주도민의 감회는 본토민의 그것보다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 제주도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3.1절 행사장으로 모여들었다.

 “큰일 났다 옥아. 황 첨지네 막내딸이 총에 맞아 죽었다지 뭐냐.”

 건넛집에 숯다리미를 빌리러 갔던 어머니가 허겁지겁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옥이는 꿈을 꾸는 듯 머릿속이 텅 비는 것을 느꼈다. 손에 들린 적삼이며 옷가지들이 스르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일본이 항복하자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미. 소간에 한반도 분단 점령이 결정되자 군정을 선포했다. 미군정은 종래의 총독부 기구를 계속 존속시키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자치 기구들을 강제로 해체했다. 미군정은 일제의 관료와 경찰출신을 대거 등용했다. 이러한 일련의 처사에 새로운 변화를 바라던 국민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에 있던 6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제주도로 귀환했다. 그들은 아무런 생계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에 따른 구직난과 생필품 부족 등은 심각할 정도였다. 잇따른 흉년과 미군정의 미곡 정책 실패 등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더구나 미군정 관리들의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모리 행위 등은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었다.

 3.1절 행사장에는 무려 3만을 헤아리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고 민족 독립국가 수립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병태의 여동생도 오빠를 따라 행사에 참석했다. 병태는 청년대표 자격으로 연사로 나섰다. 병태는 자주적인 통일 국가 건설과 미국의 퇴진 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기념식이 끝난 후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시위대가 도심을 통과할 때였다. 행사를 구경하던 학생이 경찰 기마대에 의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이를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다. 이 과정에서 14명의 군중이 총에 맞아 그중에 6명이 사망하였다. 경찰은 좌익계의 선동에 의해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포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병태 동생과 같은 보통학교 학생과 아기를 업은 아낙네, 농부 등이 대부분이었다.

 “세상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일본 놈들만 없어지면 자유로운 세상이 될 줄 알았는데……. 어떻게 경찰이 죄 없는 사람을 쏴 죽일 수가 있어. 도대체 이놈의 나라꼴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이냐.”

 옥이 어머니는 침이 마르는지 냉수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사건으로 미군정과 제주도민 간의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제주도민의 분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처럼 커지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마당에는 가지만 남은 앙상한 오동나무가 된바람에 떨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된 장대추위에 천지가 꽁꽁 얼어붙었다. 제주의 하늘을 뒤흔든 총소리는 악마의 그것이 되어 꽃다운 처녀의 부푼 꿈을 무참하게 짓밟아 놓았다. 막내딸의 죽음을 들은 황 첨지 부인은 그날로 몸져누워버렸다. 넋을 놓고 있기는 황 첨지도 마찬가지였다. 시름에 찬 황 첨지는 왼 종일 술에 취해 있었다. 일이 그 지경이다 보니 혼사 얘기는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옥아. 아무래도 혼인을 조금 미루어야 하겠다. 나라꼴을 두고만 볼 수가 없구나. 하지만, 금방 끝날 거야. 늦어도 내년 봄이면 되겠지.”

 병태가 옥이 손을 꼭 잡으며 한 말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했지만 옥이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일이 있을까 하여 노심초사하던 옥이었다. 병태는 흐느낌으로 들썩이는 옥이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을 뿐이었다.

 3.1사건이 있은 후 분노한 제주도민은 제주도청을 시발로 한 민. 관 합동 총파업을 단행했다. 도민들은 경찰 수뇌부의 인책사임과 발포경관 처벌, 희생자 유족보상 등을 요구했다. ‘3.1사건 대책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 중인 병태는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미군정의 수배를 받고 있었다.

 미군정은 파업의 발생 원인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사태를 보는 시각은 경무대도 마찬가지였다. 경무대 수뇌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어 파업 주동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미군정은 본토에 있던 극우세력인 응원경찰과 서청(西北靑年會)단원 등을 제주도에 대거 투입했다.

 그들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무자비한 테러와 끔찍한 고문, 연행, 투옥 등이 자행되었다. 검속 몇 달 사이에 그렇게 만들어져 체포된 파업 주모자만도 무려 2,000여 명에 달했다. 이 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터였다. 병태가 옥이네 집을 다녀간 것은 어제 초저녁 무렵이었다.

 “지금 쫒기는 중이야. 당분간 피해 있어야 할 것 같다. 별일 없을 거야. 너도 조심해. 특별한 일 아니면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특히 밤에는 문단속 잘하고…….”

 연방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병태는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옥이는 불도 켜지 못한 채 문고리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인적이 끊어진 골목에는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옥이가 잠자리에 든 것은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다.

 서너 식 경쯤 지났을까.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일단의 서청이 들이닥쳤다. 장지문은 돌쩌귀부터 통째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엉겁결에 들이닥친 서청은 다짜고짜 장작개비를 휘둘러댔다. 머리를 얻어맞은 옥이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소매를 붉게 물들였다. 그들은 일여덟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의 손에 들린 횃불이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온 집안을 대낮처럼 밝게 만들었다.

 “샅샅이 뒤져라. 그놈의 빨갱이 새끼, 틀림없이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다.”

 그들은 방안은 물론이고 장독대 하며 심지어 아궁이 속까지 꼬챙이를 집어넣고 들쑤셨다. 그러나 없는 사람이 나올 턱이 없었다. 그들은 병태가 보이지 않자 화풀이라도 하는 양 온 집안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 바람에 얼마 되지도 않는 살림살이며 가재도구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하여 엉망진창이 되었다. 잠시 후 옥이는 마당으로 끌려 나왔다.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부엌에서 들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서청 두 명이 누르고 있어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옥이는 애만 탈 뿐이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우두머리가 봉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독사눈을 뜨고 옥이를 노려봤다. 서청이 옥이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순간, 옥이를 보는 우두머리의 눈이 번득거렸다.

 “빨갱이 계집년. 얼굴 하나는 반반하구먼. 흐흐, 골방으로 끌고 가라.”

 서청들은 낄낄거리며 옥이를 골방으로 밀어 넣었다. 웃통을 벗어 던진 우두머리가 무서운 힘으로 옥이를 덮쳐 왔다. 밀쳐 내려고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옥이는 우두머리의 어깨를 입으로 물어뜯었다. 움찔하던 우두머리가 솥뚜껑 같은 주먹으로 옥이의 복부를 내리쳤다. 옥이는 숨이 콱 막히면서 온몸의 힘이 쑥 빠지는 것을 느꼈다.

 우두머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옥이의 치마끈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옥이의 귀속으로 아련하게 파고들었다. 옥이는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한두 시간은 좋이 더 있어야 할 터였다.

 

 

 얼어붙은 대지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갯가의 버들강아지가 수줍은 듯 실눈을 뜨고 봄을 알리고 있었다. 천지가 온통 싱그러움으로 물들었다. 서청들이 난동을 부린 날 이후 옥이는 병태를 보지 못했다. 남로당의 핵심 인물이 되어 활동 중인 병태는 행여 누라도 될까 하여 옥이를 만날 수가 없었다. 응원경찰과 서청의 무분별한 검속은 계속되었다. 이에 따른 주민들의 불만과 피해는 눈덩이처럼 쌓여만 갔다.

 그러던 중 달포 사이에 일선 지서에서는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그중 하나가 마을을 급습한 서청에 붙잡힌 청년이 현장에서 총살당한 사건이었다. 청년은 곤봉과 돌에 찍혀 유혈이 낭자한 초주검 상태에서 연행되었다. 서청은 청년을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길가에서 무참히 총살했던 거였다. 무자비한 경찰의 고문과 취조에 견디지 못한 학생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제주도는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놓였다.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가 어려워진 이승만 정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계획했다. 제주 도민들 사이에는 단선 및 단정을 반대하여 조국의 분단을 막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 지부는 미군정에 불만이 많은 제주도민의 민심을 등에 업었다. 마침 남로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병태를 포함한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들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계획했다.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일어서자.’라는 것이 도민 대다수의 정서였다.

 서청들의 무지막지한 발길에 허리를 다쳐 자리보전을 하던 옥이 어머니는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당한 엄청난 심신의 충격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거였다.

 “옥아, 맘 독하게 먹고…….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옥이 어머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오직 어머니만 의지하고 살아온 옥이로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당장 장례부터 치러야 했다. 옥이는 얼어붙은 텃밭에 작은 돌무덤을 만들었다. 언젠가는 봉분 주위에 돌담을 쌓아 번듯한 산담을 만들어 드리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이어도 싸나 이어도 싸, 우리 어머니 무슨 날에 날 낳아서 이 물속에

 인간 백성 깔렸건마는 우리 어머니 무슨 죄로 날 낳아 나 여기 물질하리.

 이어도 싸나 이어도 싸나, 한라산에 눈 내린 건 알건마는

 내 이 가슴에 분한 마음 지는 건 어느 누가 알아나 주리.

 이어도 싸나 이어도 싸, 어린 애기 떼어 두고 이 물에 들어 젖도 안 주고

 나는 점심 굶고 이 물질하여 어느 누구 먹여 살리자고 이 물질하리.

 

 어머니가 눈을 감기 전에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옥이는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찍어내었다. 옥이가 능욕을 당하면서도 목숨을 끊지 못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늙고 병들었지만 목숨과도 같이 소중한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버릴 수는 없었다. 옥이는 입술을 깨물면서 모진 목숨을 지금까지 부지하고 있었던 거였다. 마음속으로 몇 번씩 목도 매보고 바닷물에도 뛰어들어 보았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옥이가 죽을 수 없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달거리가 없었던 거였다.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배가 불러왔다.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옥이는 높은 언덕배기에서 굴러 보기도 하고 독한 간장을 사발 째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끈질긴 인연의 끈은 인력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렁저렁 덧없는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모성의 본능이랄까. 옥이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뱃속의 아기에게 정이 가는 자신을 보며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매일 같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황 첨지가 저수지에서 발견된 것도 거의 같은 시기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잃어버린 것만 해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데, 아들 내어 놓으라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닦달하는 서청의 횡포에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였다. 황 첨지가 몸을 던진 저수지 둑에는 먹다만 술병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4월 3일 새벽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봉화가 시뻘겋게 불을 뿜었다.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던 거였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깃발을 내건 350여 명의 무장대가 12곳의 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들을 공격했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단선. 단정의 반대와 통일정부 수립 촉구, 응원경찰과 서청의 추방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날의 습격으로 응원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그리고 무장대 2명 사망했다. 이 사건을 치안상황으로 간주한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을 추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청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며칠 후 경비사령부는 무장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세등등하던 응원경찰 및 서청의 횡포는 기름에 불을 붙인 듯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응원경찰과 서청의 비인간적인 만행은 오히려 무장대의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피해 산으로 피신해 들어가고 있었다. 사태가 쉽게 수습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에 사태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국방경비대 연대장은 ‘선선무후토벌’ 원칙을 정했다. 연대장은 이 사건을 응원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던 거였다. 그는 우선적으로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국방경비대 연대장과 무장대 대장이 협상을 하여 전투중지와 무장해제, 무장대의 신변보장 등을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미군정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5월 10일 총선거 전에 무장대를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미군정은 무장대가 북조선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이고 4.3은 그들이 주축이 된 반란으로 규정했다. 급기야, 미군정의 사주를 받은 서청이 무장대를 가장하여 멀쩡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양민을 모조리 학살했다. 미군정은 이 장면을 하늘과 땅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무장대의 습격이라고 선전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응원경찰은 평화협상 소식을 듣고 산에서 내려오던 민간인에게까지 총격을 가했다. 물론 그들은 무장대를 가장했다. 결국, 미군정에 의한 방해공작으로 평화협정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무장봉기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옥이가 밭에서 채소를 뜯어 막 집으로 들어설 때였다. 한 무리의 응원경찰이 동네를 기습해 왔다. 발 빠른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옥이도 가까스로 돌담 뒤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들은 집집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끌어 모아 동네 공터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빨갱이 새끼들 데리고 오라면서 무지막지하게 곤봉과 장작개비를 휘둘렀다. 그리고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옷을 발가벗겼다.

 동네 사람들은 할 짓이 아니었으나 옷을 벗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의 만행에 배겨날 수가 없었던 거였다. 응원경찰은 끝내 옷 벗기를 거부하던 할아버지를 장작으로 내리쳤다. 놀란 며느리가 할아버지를 몸으로 막아섰다. 머리를 맞은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피를 쏟으며 숨을 거두었다. 응원경찰은 여기저기 퍼질러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듯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온 집안이 다 빨갱이구먼. 네 서방도 폭도지. 어디다 숨겼어, 이년아.”

 응원경찰이 할아버지를 붙잡고 흐느끼는 며느리의 머리채를 다짜고짜 휘어잡았다. 그리곤 땅바닥에 똑바로 누인 후 긴 통나무를 배 위에 깔았다. 벌거벗은 몸 그대로였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통나무의 양쪽 끝에 시소 타듯이 한 명씩 걸터앉아 고문을 계속했다. 며느리는 정신을 잃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동네 사람들도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장작놀음에 싫증이 난 응원경찰은 처녀 총각 한 명씩을 앞으로 끌어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짓을 하도록 강요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는 처녀 총각에게도 가차 없이 장작을 휘둘렀다. 하지만, 말을 들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뭔가 수군거리던 그들은 처녀 총각과 며느리를 근처 숲으로 끌고 갔다. 잠시 후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 그들이 말하는 즉결처분이었다.

 “빨갱이 짓 하던 연놈들이 처분된 것이다. 뭣들 하고 있어. 박수를 치란 말이야, 박수를…….”

 응원경찰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들의 눈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은 두려운 가운데서도 이를 갈고 있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이 동네를 빠져나간 뒤에도 다리에 힘이 풀린 옥이는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4.3사태의 해결을 놓고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국방경비대 연대장은 토벌정책을 주장하는 경무부장과 육탄전까지 벌렸다. 하지만, 세(勢)에 밀린 연대장은 뜻을 접은 채 전격 해임당하고 말았다. 그의 후임으로 일본군 소위출신으로 미군정 장관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 새로운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전부를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라고 말할 만큼 과격한 사람이었다.

 5월 10일에는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가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처리 되었다. 단독선거 거부지역이 된 제주도는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무장대에 의한 우익단체의 습격 및 선거관리위원장 등 우익 인사에 대한 납치와 살해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었다.

 선거가 끝난 직후 미군정은 군 병력과 응원경찰을 더욱 보강했다. 그들은 4.3사태의 근본적인 치유보다는 대대적인 토벌위주의 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책은 일반 주민을 무장대로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켜 제주도민의 반감은 한층 늘어만 갔다. 제주도민의 운명은 바야흐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암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온 산이 단풍으로 붉게 물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엔 황조롱이 한 마리가 크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결실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그것을 만끽할 여유가 없는 땅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본격적인 제주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거였다. 이에 앞서 국방경비대는 해안에서 5㎞ 이상을 적성지역으로 규정하고 그 지역에 통행금지를 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강제소개(疏開)령이었다. 이를 어길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로 인정, 총살에 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해안 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 산간 마을이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어 경비대는 제주 해상 교통을 차단하고 해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제주도는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섬이 된 거였다.

 제주도는 참혹한 집단 학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토벌대의 만행은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마다 치를 떨 일 뿐이었다. 그들이 습격하는 중 산간 마을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고 있었다. 가옥에 대한 방화는 물론이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보이는 대로 무조건 총살을 자행했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40개 이상의 마을이 불탔고 희생자도 벌써 수천 명에 이르고 있었다.

 옥이는 동광리에 가는 길이었다. 자주 다니던 길이었건만 오늘따라 처음 가는 길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장독대 옆 감나무에는 먹음직스러운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늦었지만 황 첨지의 죽음을 듣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거였다. 늘 활기에 차 있던 황 첨지 댁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기운을 차린 황 첨지 부인은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대 여섯은 되어 보이던 일군들도 다 떠나고 부인 혼자서 넓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가야 한다는 얘기를 이웃을 통해 들었으나 부인은 그럴 수가 없었다. 1년 넘게 보지 못한 아들 병태가 언제 찾아올지 몰라서였다. 황 첨지 부인이 반색을 하며 옥이를 반겼다.

 “이게 누구냐. 어서 와라, 옥아.”

 부인은 말을 잊지 못했다. 옥이도 피붙이라고는 없는 입장이다 보니 꼭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옥이는 불러오는 배를 감출 수가 없었다. 옥이는 흐느끼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황 첨지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옥이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둘은 꼭 잡은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어느덧 뉘엿뉘엿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옥이가 해지기 전에 집에 닿으려면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갑자기 동네에 푸른 제복에 철모를 쓴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불이 붙은 긴 대빗자루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동광리 하늘은 화염으로 뒤 덥혔다.

 동광리 주민 대부분은 소개령을 받고 해안 마을로 내려가거나 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소개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옥이도 소개령을 듣지 못했었다. 주민들은 산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들은 도망가는 사람에게 무조건 총을 난사했다. 벌써 대여섯 명이 총에 맞아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피하지 못하고 집에 숨어 있던 주민들이 속속 공터로 끌려 나왔다. 옥이는 황 첨지 부인을 업고 작은 뒷담을 넘어 산으로 뛰고 있었다.

 황 첨지네 사랑채와 별채, 외양간도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순간, 콩을 볶는 것 같은 총소리가 들렸다. 황 첨지 부인이 옥이 등에서 축 몸을 늘어뜨렸다. 토벌대가 쏜 총에 맞은 부인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옥이는 부인 밑에 깔린 채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공터에 끌려나온 주민도 20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토벌대에게 말이 필요 없는 폭도였다.

 “빨갱이 새끼들, 저놈들 죽이기에는 총알도 아깝지. 빨갱이는 씨를 말려야 해. 인정사장 볼 것 없다. 모조리 창으로 찔러 죽여라.”

 살육이 시작되었다. 죽창에 찔려 갈라진 배에서 흘러내린 내장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공터는 온통 피바다가 되고 있었다. 죽창을 피해 도망을 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토벌대의 무자비한 총이 불을 뿜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앤다는 토벌대의 삼진정책(三盡政策)은 제주도를 온통 피로 물들여 갔다. 비라도 퍼부을 듯 잔뜩 흐린 하늘엔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초겨울이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얼굴을 찢을 듯이 할퀴고 지나갔다. 눈은 새벽부터 흩뿌렸다. 하얀 눈 속에 묻힌 세상은 겨울잠에 빠진 듯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였다. 도너리오름 곶자왈에 숨어 있던 동광리 사람들이 용암 동굴인 큰넓궤를 발견한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큰넓궤는 어지간해서는 발견될 염려가 없는 곳이었다. 더구나 다행스러운 것은 큰넓궤가 그런대로 추위를 이겨낼 만한 공간이라는 거였다.

 우거진 숲 속에 있는 입구는 겨우 한 사람이 기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입구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절벽을 내려서면 넓은 공간이 나왔다. 굴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나 벌써 동광리 사람 100여 명이 큰넓궤로 찾아들었다. 그들은 소개령을 알지 못해 남아 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비록 초라한 움막이지만 정들었던 집이 다 타버린 그들로서는 딱히 갈 곳도 없었다.

 옥이는 큰넓궤의 제일 안쪽에 있는 작은 굴속에 있었다. 그저께 밤에 양수가 비치더니 이른 아침부터 진통이 시작되었다. 벌써 몇 시간째였다. 옥이의 몸은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얼마나 깨물었는지 입술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어느 순간,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옥이에게 다시 한 번 진통이 찾아왔다. 옥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숨을 참으며 죽을힘을 다해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으앙.”

 순간, 고고의 울음을 터트리며 운명처럼 한 생명이 탄생했다. 아들이었다. 옥이는 얼이 빠진 얼굴로 핏덩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옥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던 눈발도 숨을 죽였다.

 “쯧쯧, 기구하기도 하지. 어쩌다 동굴 속에서 태어나누, 이 엄동설한에……. 굴동이구먼, 허허. 굴동이야. 그놈 참 생긴 거 하고는…….”

 옥이와 같이 땀으로 목욕을 하며 핏덩이를 받아낸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지난 난리 통에 아들과 며느리, 손자 등 식구 전체를 잃었다. 세상 살아갈 의지를 잃고 있던 할머니는 굴동이에게 친손자를 대하듯 온갖 정성을 베풀었다. 굴동이에게는 생명을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교전 중에 다리를 다쳐 굴속으로 피신해 온 무장대원의 말은 엄청났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 100여 개의 중 산간 마을이 불타고 죽은 사람만도 수만을 헤아린다는 거였다. 마을을 점령한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이 대조했다. 남자들은 거의 피난을 가고 노약자들만 대부분인 마을이었다. 그들은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는 집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았다. 집을 비운 부모 형제를 대신하여 누군가 한 명은 대신 죽어야 했다. 이른바 대살(代殺)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장대를 쫒아 중 산간 마을로 들이닥친 토벌대는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모두 집결시켰다. 토벌대는 그들이 죄가 있고 없고도 따지지 않은 채 모조리 총살했다. 그런 후 여자들을 따로 끌어내어 욕심을 채운 후에 무참하게 죽였다. 그 자리에서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른 채 죽은 사람만 15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무장대원의 말은 약과에 불과했다. 집단 학살은 중 산간 지역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제주시에 있는 해안 마을에서 무장대에 기습을 받은 군인 2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곧바로 토벌대의 보복이 자행되었다. 2개 소대쯤 되는 토벌대가 마을로 밀어닥쳤다. 토벌대는 주민들이 폭도와 내통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간주하고 300여 채의 집을 불태웠다. 눈이 뒤집힌 토벌대는 주민 1,000여 명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뒤 무자비하게 총질을 했다. 결국, 이날 400여 명의 주민이 한자리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칠흑 같은 굴속에도 시간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동광리 사람들은 처음 굴에 올 때만 해도 며칠만 피해 있으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집을 나와 큰넓궤에서 숨어 생활 한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다 보니 굴속의 생활은 엄격하기만 했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들은 주로 굴 안쪽에서 생활했고 젊은이들은 밤을 도와 식량과 식수를 나르고 무장대들의 피신을 도와주고 있었다.

 밥도 마음대로 해먹을 수가 없었다. 연기 때문에 위치가 발각될까 두려워 근처의 작은 궤나 숲에서 지어다가 먹었다. 대소변도 굴 안쪽에서 해결했다. 사람이 사는 거라고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청년들은 날카로운 죽창을 하나씩 들고 주변 굴과 야산에 숨어서 늘 망을 보고 있었다. 토벌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그, 불쌍한 놈. 여기서 죽으나 내려가서 죽으나……. 안 되겠다, 옥아. 내일은 동네로 내려가자. 어디 가면 성한 집하나 못 찾을까.”

 굴동이 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굴동이에게 정을 쏟던 할머니는 애가 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뜨거운 방바닥에 엉덩이 한번 못 대본 굴동이였다. 그동안 잘 견딘다 했더니 강추위에 덜컥 병이 난 거였다. 몸이 상하기는 옥이도 마찬가지였다. 미역국은 고사하고 따뜻한 물 한번 제대로 얻어 마시지 못했다. 해안을 타고 올라온 섣달의 칼바람이 무서운 기세로 큰넓궤를 들이치고 있었다.

 옥이가 산에서 내려간 지 열흘이 지나서였다. 병태가 큰넓궤로 옥이를 찾아왔다. 병태는 토벌대에 쫓기던 중 무장대에서 홀로 떨어져 나왔던 거였다. 병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손질하지 않았는지 덥수룩한 수염이 온 얼굴을 덮고 있었다. 비쩍 말라버린 얼굴에 눈빛만 살아 빛을 뿜고 있을 뿐이었다. 병태는 아직 부모님의 장례는커녕 시신조차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왔던 옥이도 그 모양이었다. 굴동이 얘기를 들은 거였다. 넋을 놓고 있던 병태는 날이 밝자 아무 말 없이 굴을 빠져나갔다.

 병태가 떠나간 다음날이었다. 동광리 사람들이 굴에서 생활한 지 근 50여 일이 되던 때였다. 큰넓궤 밖에서 망을 보던 청년이 토벌대에게 발각되었다. 토벌대가 먹이를 본 늑대처럼 총을 쏘아대며 굴 입구로 밀려왔다. 사람들은 굴 입구를 이불이나 솜 등으로 막았다. 그 위에 고춧가루를 쌓은 뒤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키를 이용하여 바깥으로 매운 연기를 내보냈다.

 큰넓궤로 진입하지 못하고 밖에서 총만 싸대던 토벌대는 밤이 되자 철수를 했다. 입구에는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무거운 돌을 쌓아놓았다. 내일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될 터였다. 밤이 되자 근처 도너리오름에서 망을 보던 마을 청년들이 큰넓궤로 내려와 돌을 허물고 사람들을 피신시켰다. 하지만, 옷이며 신발 하나 변변치 못한 사람들은 엄동설한에 갈 곳이 없었다. 집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광리 사람들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길을 떠났다. 그 숫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늘도 그들의 운명을 오래 지켜주지는 못했다. 악착같이 추격해온 토벌대에 대부분의 사람이 총에 맞아 죽거나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정방폭포 근처로 끌려간 동광리 사람들은 폭도라는 누명을 걸머지고 한 많은 생을 마쳐야만 했다. 바닷물에 떠내려간 시신만도 수십 구였다. 또 한 번의 학살이 자행되었던 거였다. 무심한 갈매기가 끼룩끼룩, 소리를 내어 울었다. 겨울 바다에는 핏빛 파도가 섬을 삼킬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

 

 

 

 

 

 

 

080218淸海